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공화국 (문단 편집) === 카밀루스의 추방과 켈트족의 침공 === 로마의 귀족과 평민들이 이런 내분을 벌이는 동안 갈리아에서 [[켈트]]족이 남하하게 되었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베이 점령의 5년 뒤인 기원전 391년에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우선 에트루리아 지역의 클루시움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이때 클루시움은 베이 점령 이후 에트루리아 지역에 세력을 뻗기 시작한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빴고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켈트족에게서 방파제가 될 수 있었던 베이를 없앤 것은 로마 자신이었다. [[브렌누스]]가 지휘하는 세노네스족은 로마로 진격했는데 당시 로마는 이미 라티움의 패권자였으나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 즉 베이에 제2의 수도 건설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다. 급조된 로마군은 기원전 390년 7월에 벌어진 '''[[알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로마의 성문도 열려 있었다고 한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성 안으로 진입하였고 로마 시민은 싸울 수 있는 자들만 뽑아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캄피돌리오 언덕|카피톨리누스 언덕]] 위로 올라가 농성하였다. 원로원 의원이더라도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가지 못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방어에 유리했으나 비좁았기 때문이다. 켈트족은 원로원 의원, 어린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죽이고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살랐다.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긴 하였으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로마인들이 계속 저항하였고, 켈트족은 떠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어 도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몰랐다. 시체를 수로에 그냥 버려 더러워진 수돗물을 먹고 전염병까지 생길 정도였다. 로마인들은 도저히 방법이 없자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켈트족은 300kg 황금을 받고 로마를 떠났다. 로마는 다시 카밀루스를 불러들여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떠나는 켈트족을 습격하여 분풀이를 하였다. 하지만 주변의 라틴 부족들은 로마를 깔보기 시작하였고 이후 주변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20년이나 소비하게 된다. 로마는 켈트계 세노네스족에게 당한 패배를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그리스식의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한다. '팔랑크스'는 모든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레기온 스타일은 훗날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발전한 뒤 [[칸나이 전투]] 직후 대대(Cohort)를 편성함으로써 완성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켈트족과 상대하였을 때,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 높은 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후로 높은 계급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계급순의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물론 나중에는 보통 계급과 상관없이 전투 경험과 나이 순으로 3줄로 서게된다.]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로 나뉘는 '''마니풀루스 진형'''이었다. 즉 켈트에게 당한 패배는 로마가 레기온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